[애슬레틱] 벽에 걸린 전술도판들을 바라보는 아르테타의 눈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있는가

Mikel Arteta lived alone with tactical diagrams on the walls: what lies behind the eyes of Arsenal’s new manager
 by Daniel Taylor and David Ornstein and James McNicholas








 많은 사람들이 미켈아르테타가 우나이 에메리와 최종 결선까지 갔던 면접에 대해 얘기해왔지만 사실 그 순간보다 아르테타가 역으로 클럽을 인터뷰했던 순간이 아르테타를 더 잘 설명할 지도 모르겠다.

 

 보드진에게 아르센 벵거의 후임으로 적절한지 질문을 받았던 2018년에서 다시 시계바늘을 2년 더 돌리면, 아르테타는 자신의 코칭커리어의 시작을 앞에두고 3개의 제안을 받았고 그때는 역으로 오히려 보드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3가지 제안 중 하나는 벵거로부터 아스날 아카데미를 책임질 수 있냐는 제안이었고, 다른하나는 포체티노와 함께 토트넘에서 일하자는 제안이었고, 마지막으로 펩과르디올라의 스태프로 맨시티에서 일하자는 제안이었다.



 지금 시티에서 아르테타는 자신이 아스날떠나기전과 마찬가지처럼 많은 고민과 자기탐구를 하고 있다. 이는 제안이 맘에 들지않아서가 아니라 펩 프로젝트를 떠나기 어려워서일 것이다. 자신을 가르쳤던 아르센 벵거와의 유대감과 아스날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말이다.





 아르테타는 당신도 눈치챘을듯이, 감정적이거나 노스탤지아로 결정을 내리는 타입이 아니다. 그는 이성적인 고찰로 선택을 내리는 타입이다. 아르테타가 아스날로 복귀하는 것을 사람들은 흔히 주장으로 속했던 클럽으로 그저 다시 돌아오는 감정적인 순간으로 쉽게 해석하곤 한다. 허나 현실은 그보다 더 복잡하다. 아르테타는 스스로가 아스날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절대 이 감독으로의 도약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몇몇 소스들은 아르테타가 18개월전 인터뷰했던 그 순간보다 더 경험있고 성숙한 코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전직 아스날 선수들 중 그저 한명이 아니라 전술가로서 더 명성을 쌓기도 했다.



 아르테타는 클럽 스쿼드 전체를 갈아엎을 생각으로 아스날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기도했다. 실제로 애슬레틱이 알기론, 아르테타는 스쿼드 선수 하나하나는 시티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정말 진지하다고 덧붙였다.



 아스날은 아르테타가 떠난뒤로 그의 발자취를 계속 주시해왔다. 아르테타가 바로 감독 선임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실망했지만, 소식통들은 아르테타가 벵거 후임으로 바로 오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바로 후임으로 맡았다면 너무나도 큰 도전이기 때문이다.



 아스날팬들은 1516 에미레이츠에서 아르테타를 떠나보낸 마지막 경기를 생각하고 그와 작별하게 된 기억을 떠올리게되면 그에 대한 감정적인 애착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아르테타는 주장으로 팀을 이끌며 헐시티 상대로 2014년 fa컵 우승을 했고 재킷과 넥타이를 벗어던지고 아르센 벵거와 함께 나란히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로부터 12달 뒤 아스날은 다시 웸블리로 왔다. 이번에는 상대가 아스톤빌라였고 아르테타는 부상으로 인해서 시즌절반을 고생했고 이 경기에서도 결장했다. 그러나 드레싱룸에서의 셀레브레이션에 참석했고 이때의 즐거움은 훗날 그를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젊은 감독으로 만드는데 자산이 되었다.



 스탄크뢴케는 당시 샴페인이 흩뿌려져있는 드레싱룸에 들어왔다. 사장 가지디스 역시 거기에 있었다. 아르테타는 클럽에서 연장자 선수들로 약간 진지한 선비취급을 받곤 했다. 거기서 아르테타는 가지디스를 향해 “헤이 아이반!, 우리 보너스는 안나와?”라고 외쳤고 가지디스는 이를 조크로 받아들였다. 그러고선 아르테타 심장을 가리키며 “그보다 더 중요한걸 얻었잖아?”라고 했다.



 아르테타는 33살이었고 부상은 그를 치지게 했다. 지금도 33살은 많은 축구선수들이 불안감이 밀려오는 나이이긴 하지만 그때 아르테타에게는 확실히 감독으로 가기위한 대기시간이라는 공통생각이 있긴 했다.





 아마도 아르테타에게는 항상 다른선수들과 약간 떨어져있다는 알 수 없는 공기가 흘렀기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르테타는 인기도 있었고 가진 능력과 지식으로 인해서 확실히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드레싱룸의 나태한 분위기에는 휩쓸리지않았고 살짝 떨어져서는 냉철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르테타는 강렬했고 진지하며 추진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으면 농담에 같이 동참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잘못된 길로 가는 팀동료를 질책하는 차가운 분위기 역시 가진 선수였다. 그는 타고난 지도자이며 확실한 주장이었다. 그는 자신을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포지셔닝했고 이렇게 유지하는걸 좋아했다.



 아르테타가 벵거와 함께하며 지쳤던 순간 중 하나로 벵거는 하프타임때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르테타는 종종 이 쉬는 시간에 팀동료에게 전술적인 지시를 내리기 위해 그 시간을 사용했다. 훈련장에서는 선수들보다는 코칭스태프와 더 많은 말을 했다. 그는 비디오 분석가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다가올 상대에 대한 강점과 약점을 논했다. 그리고 분석가들의 소프트웨어가 들어있는 아이패드를 살펴보고는 자신만의 제안을 하기도 했다.



 축구판은 살짝 이기적인 동네여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기자신만을 신경쓰곤 한다. 허나 아르테타는 모든 일에 관여하고 즐거워했다. 아르테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보았고 어쩌면 그래서 아르테타는 축구선수로서 마냥 즐기지도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아르테타는 자신은 그저 운이 좋아서 남들이 잘 얻지못하는 능력을 가져서 축구를 직업 가진거였고, 관중들의 환호와 여타 축구판에 딸려오는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아르테타는 과르디올라와 마찬가지로 축구는 엄청난 환호를 맛보게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밝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아르테타의 지인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르테타는 진짜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이다. 그는 괴물은 아니지만 동시에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주변 사람들은 높은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은 미켈에게 부인, 아이들, 백만장자, 축구선수, 이런걸 갖춘 삶에 대해서 거의 완벽하다면서 환상적인 삶을 보내고 있지않냐고 말한다. 그들은 항상”와 너 아스날에서 정말 즐겁겟구나”라고 하지만 사실 아르테타는 그렇게 말처럼 느끼진 않았다. 물론 그도 그렇지 못한걸 죄악으로 느끼긴 했다. ‘내 삶의 모든것들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데 난 왜 즐기질 못하지’ 기본적으로 아르테타는 극도의 경쟁체제에서 어떻게든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물론 모든 위대한 매니저들과 코치들은 강박적인 증세가 있다. 아르테타의 경우에도 축구선수시절 모든 준비과정에서 디테일들을 다 흡수하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식으로 축구를 탐닉하진 않고 아스날에 있는 사람들도 때로는 아르테타에게 자신의 일을 좀 더 집중해라고 하거나 혹은 “야 우리가 너보다 많이 알고 있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곤 했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르테타의 엄청난 탐구력과 헌신을 존중하고 그의 지적호기심에 대해서 성숙함과 지성의 상징으로 바라보았다. 아르테타는 주장 역할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이는 피치안팎에서도 그랬다. 그는 스스로를 벵거와 나란히 두었고 이런 행동에 대해 다른 선수들은 “Teacher’s pet’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르테타에게 어떤 특권이 생긴 것은 그가 엄청나게 팀을 위해 헌신해서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아르테타는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먼저, 더 오래 과르디올라와 맞닿아있었다.

























 2012년 바르셀로나와 첼시의 챔피언스리그 준결승때 과르디올라는 아르테타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는 훗날 아르테타가 4년뒤 아스날을 떠나 시티로 가게되는 일련의 사건들로 연결되었다.

 과르디올라는 아르테타를 바르셀로나 유스아카데미에 속해있던 11살 때부터 알아왔다. 아르테타는 바르셀로나 B에서 데뷔했고 그시절 16살이었다. 그리고 이는 미드필더에서 과르디올라의 자리를 대체하는 역할이었다. 그들은 느슨하게 연결을 유지해왔고 라마시아 프로그램에서 졸업했을 대도 가서 아르테타에게 존중을 표했다. 아르테타는 런던에 살면서 펩의 동생이 페레와 같은 지역에 살기도 했다. 



 여기서 바로 2012년 과르디올라가 아르테타에게 전화를 걸었던 순간으로 연결된다. 펩은 첼시의 전술분석을 원했다. 아르테타는 전술의 디테일들을 최대한 정교하게 설명했다. 과르디올라는 자신이 통화하는 이 남자가 꽤 높은 축구이해도를 갖추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아르테타의 조언에 감사를 표했고 더 자주 아르테타와 대화하겠다고 가슴에 새겨놓았다.



  그리고 2015년 아스날은 챔피언스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만났다. 바이언은 5:1로 이겼고 경기 이후에 펩은 아르테타에게 자신이 잉글랜드 클럽을 맡게 되면 같이 팀을 이루자고 제안했다.  과르디올라는 펠레그리니의 후임으로 시티와 의논하고 있던 단계였다. 아르테타가 선수로 마지막 시즌올 보냈고, 모든 일이 갑자기 일어났다. 아르테타는 시즌 후반에 뮌헨으로 갔고  과르디올라가 어떻게 자신의 선수들과 경기를 풀어내는지 자세히 지켜봤다. 그리고 이 두남자 서로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마을정도 크기의 시티 훈련장에서 아르테타는 자신만의 사무실을 가졌다. 과르디올라처럼 그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실제로 과르디올라는 자기의 코치가 좀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길 원했고 필요하다면 그 의견을 채택했다. 펩은 뉴질랜드 올블랙 럭비팀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주변의 예스맨보다는 도전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아르테타는 이에 완전히 적합했다. 아르테타는 다른 코치들이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안 화이트보드에 전술 도판을 그리거나 중요 포인트들을 적곤 했다.



 맨시티 선수들은 1대1세션에 불려가곤 했다. 아르테타가 선수시절 다정한 타입은 아니었기에 그어느 누구도 코칭스타일도 다정할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르테타는 직설적으로 포인트를 말하는 타입이었고 목소리도 높이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6개국어 역시 도움이 되었다. 그는 무뚝뚝했지만 과르디올라가 좀 더 냉담한 태도를 보일 경우에는 동시에 *좋은경찰 나쁜경찰 전략을 사용해서 다정하게 하곤했다.





*나쁜경찰이 먼저 취조를해서 흔들어 놓은 다음 좋은 경찰이 인간적으로 접근해서 경계심을 풀고 인간적으로 기대게 되어 자백하게 만드는 취조방법



 이야기는 다시 1718시즌 맨시티가 브라이튼 상대했던 시즌 첫경기로 돌아가보자. 맨시티는 윙백시스템을 사용했고 르로이 사네는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가 아닌 뒤로 수비를 쫓길 요구받고 있었다. 사네는 그렇게 하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미켈이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르로이 나도 니가 이 포지션을 싫어하는 걸 알어. 하지만 좀 스마트 하게하자. 넌 아직 어리고 많은 걸 할 수 있고 더 성장해야 해” “미켈에게 정말 빠져버렸다. 그는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고 매우 좋은 사람이었으며 훌륭한 코치였다. 그는 내게 많은 조언들을 해줬다. 우리는 서로 내 무브먼트, 언제 수비수 뒷공간으로 파고들지 언제 온더볼 플레이를 해야 하고 스피드 조절하면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많은 얘길 나눴다. 그는 항상 내 옆에 있어줬다.”



 아르테타는 과르디올라의 스태프로 합류하던 그때, 아르헨티나 tv리포터이자 여배우였던 Lorena Bernal은 LA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족은 다시 재결합했지만 이는 오랜시간이후였다. 그녀와 아들들은 아르테타와 8시간 시차를 두고 살았다. 친구들은 맨체스터에 있는 아르테타의 아파트를 방문하고는 깜짝 놀랐다. 아르테타가 벽에 메모지와 전술도판등을 붙이며 살아오는 생활패턴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TV는 계속해서 세계 어딘가의 축구경기를 보여주고 있고 만일 라이브 경기가 없다면 벵거가 그랬듯이 예전 녹화본을 틀어놓았다. 아르테타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인정했지만 그가 원하는걸 얻기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화들을 통해 왜 아르테타의 아스날동료들이 그를 “Gaffer”라고 했고, 몇몇 선수들은 때때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우며 아르테타 그 눈빛뒤로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gaffer는 영국 구어체로 보스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르테타는 epl에서 엄청난 두명의 감독과 일하면서 자신만의 철학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스날에서 마지막시즌, 공식 홈페이지에 아르테타는 “Mikel Arteta FC’를 상상해보고 이에 대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써보라고 요청받았다. “내 철학은 확실하다.” 아르테타는 말했다. “난 모든 사람들에게 120퍼센트 헌신할 것이고 이것이 내 첫번째 원칙이다. 그렇게 안한다면 선수는 나를 위해 뛰지않을 것이다. 일할 땐 일하고 놀땐 내가 먼저 놀면서 풀어줄 것이다. 이건 필수적인 규칙이다. 난 축구가 정말 즐겁고 의미 있는 스포츠였으면 한다. 이 모든 것들과 정반대 형태의 축구 개념은 난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우리는 경기를 하고 솔선수범하며 우리를 보러오는 관중들을 즐겁게 해줘야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 100퍼센트 확신하고 나 역시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이 글들 다시 읽어보면 아르테타가 10위권으로 떨어진 이 클럽을 왜 맡게 되었고, 벵거감독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팀동료를 믿어라. 아르테타는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피치의 좁은 공간에서 패스가 팀동료에게 패스하면서 애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단지 팀동료를 찾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선수들의 주발이나 턴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는지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선수 발로 볼을 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더 세밀한 디테일들도 있다. 아르테타는 불필요한 파울과 스로인은 팀의 모멘텀을 더 나아 가끔은 회복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상대가 원하는 뱡항으로 게임을 이끌게 냅두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볼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 없을시보다 덜 피곤한다고 주문처럼 말한다. “볼을 잘 유지만해도 상대는 긴장하게 되고 적극적으로 나서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상대는 자신들의 포지션을 깨야하고 결국 공간을 노출하게 된다. 인내- 이것이야말로 그저 좋은 선수와 최고의 선수를 가르는 차이점이다.”



 확실히 30대 언저리의 선수가 할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허나 이는 아르테타가 플레이해온 방식에 딱 들어맞는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해 *PSG로 옮겼고 레인져스를 거쳐 에버튼으로 왔고 아스날에서 새롭게 홀딩미드필더로 탄생했다.



*psg시절 아르테타는 포체티노와 인연을 맺게 된다.



 아르테타는 에버튼 올해의 선수로 두번 이름을 올렸고 머지사이드에서 스타일리시한 패스를 뿌렸지만 스페인에서는 한번도 국대경기를 출전 못했고 심지어 상비군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아르테타의 겸손하게 스스로가 들만한 자격이 부족했다고 얘기했으나 에버튼 팬들에게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블루키퍼 사이트에서 올해의 가장 인상깊은 미드필더 투표를 방해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 표가 앞서기도 했다.



 그리고 아르테타는 이번에는 공정한 상황에서 리버풀 에코스포츠가 뽑은 올해의 스포츠인으로 제라드를 누르고 수상하기도 했다. 그때 미처 감사연설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말에서 아르테타는 자만하지 않는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허나 2011년 여름 마지막날 아르테타가 아스날로의 이적은 또다른 아르테타의 외골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아스날은 올드트래포드에서 맨유상대로 8:2로 대패한뒤 뒷늦게 아르테타를 찾아갔다. 재정적으로도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었고 심지어 메디컬 받을 시간도 부족했다. 허나 아르테타는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를 가장 잘아는 사람들은 아르테타가 일단 결정하면 자신 뜻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빌 켄라이트는 이 거래에 대해 화났고 자신의 선수를 이렇게 유혹한 것에 대해 아스날 측에 화를 내며 욕했는데, 아르테타는 이에 직접 찾아가서 이적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하고 이해를 부탁하기도 했다.



 한 지인은 아르테타가 카리스마가 강하고 매우 추진력이 강해서 한번 머리에서 정해진 일은 끊어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아르테타는 글래스고로 옮기고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아스날로 옮길 시점에는 매우 유창했다. 또한 영국의 축구가 스페인과 프랑스와 다르게 굉장히 육체적으로 거친리그인 것을 깨달았따. 2008년 블랙번과의 경기에서 아르테타는 팀동료들이 그에게 상대 선수가 널 내쫓으려 할 테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날 아르테타는 감스트 페데르센의 목을 조르기도 했다.



 2017년 올드 트래포드의 맨체스터 더비 선수가 두 선수 간의 싸움으로 끝났을 때, 아르테타는 날아다니는 음료 병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하면서 시티 스태프들과 스크럼하고 있었고  있었다. 또한 그 전년도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서 리오넬 메시와 언쟁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과르디올라는 이를 부인했다. ) 이제 아스날-토트넘 이 북런던 더비에서 무리뉴와 어떤 관계를 보일지도 주목 할만한 가치가 있다.



 첼시 감독시절 무리뉴는 아스날 선수들은 ‘징징 울어대는 전통’이 있다고 비난하면서 아르테타 역시 비난했다. 아르테타는 존오비 미켈과의 몸싸움에서 다쳤고 무리뉴는 벵거의 심복을 비난하면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아르테타는 다시 수면위로 올라오기를 택했다. 아르테타의 행동 지침은 상대를 이기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상대를 앞지르고, 압도하며, 상대보다 더 깊게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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