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잉글랜드를 바꾼 프랑스인, 아르센 벵거

 


 프리미어리그가 1992년 개편한 이후로 수많은 외국인들이 프리미어리그를 찾아왔고,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리그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이 프랑스인만큼 프리미어리그를 바꾼 이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국내를 넘어서 전세계로 뻗어있는 스카우팅 시스템, 통계와 같은 스포츠 과학 도입, 롱볼을 벗어나 짧은 패스를 앞세운 기술축구, 체계적인 훈련법, 스트레칭과 요가를 통한 부상관리, 축구경기에 맞춘 식이요법도입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패우승까지 



이 모든 걸 한사람이 이뤄냈다는게 믿어지질 않지만 이걸 다 한번에 이뤄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르센 벵거입니다.


 벵거는 흔들리고 있는 아스날에 부임했습니다. 아스날의 영광을 이끌었던 조지그레이엄이 에이전트와 관련된 비리로 사임하게 되고, 중간에 브루스 리옥감독을 잠깐 거치면서 과도기를 겪고 있었죠.  



모나코에서 명성을 얻고 바이에른 뮌헨의 오퍼도 받았던 벵거였지만 잉글랜드 축구 내부에서는 인지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언론들과 상대 감독들에게 무시와 견제를 받았습니다. 특히 퍼거슨이 가장 열정적이였습니다. 퍼거슨은 언론을 통한 심리전으로 상대를 흔드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퍼거슨은 벵거를 두고 언론상에 인터뷰하길


“아르센벵거는 일본에서 와서 잉글랜드 축구가 어떤 곳인지는 전혀 모를 것이다. 물론 그가 빅클럽에 부임하긴 했지만, 아스날은 이미 흘러간 명문이다. 자기일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여기 초짜면서 뭐라 말하지말고 일본축구에 대해서나 떠들길 바란다.”



하지만 벵거는 이에 흔들리지않았고, 벵거는 이피엘 출범이후 퍼거슨에게 가장 위협적인 남자가 되었습니다. 

 아스날에 부임한 벵거는, 오자마자 부임 첫해 9697시즌 리그 3위를 기록했고, 다음 9798시즌 막판 리그 18경기 무패를 기록까지하면서 리그와 fa컵 더블을 달성했습니다. 심지어 우승시즌 오베르마스의 활약으로 홈 어웨이 둘다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전까지 프리미어리그 출범이후 6시즌동안 5번이나 우승한 퍼거슨의 맨유에게 물을 먹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피엘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알린 벵거의 다음 스텝은 잉글랜드 축구계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아르센벵거가 마치 프리미어리그에 첫번째로 제대로된 식습관과 식이요법을 도입한 사람처럼 인식되지만, 벵거 이전에도 도입하려했던 혁신가들이 있었습니다. 

80년대에 리버풀 선수로 활약했던 호주출신 크레이그 존스턴과, 빅샘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샘 앨러다이스였습니다.

이둘은 미국 스포츠에 영향을 받아 미국 스포츠과학을 도입해서 선수관리하는 법을 바꿔나갔습니다.


하지만 벵거가 이 둘보다 더 선구자로 인식되었던 이유는 바로 성적때문이였습니다. 다들 머뭇거리고 도입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는 사이, 벵거는 바로 그 방법을 통해 퍼거슨의 천하를 흔들었기때문입니다.


  덕분에 퍼거슨을 깨지 못했고 깨는 법을 알고 싶어했던 모든 이들에게 벵거는 하나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렇게해서 결국 잉글랜드 축구 전역이 아르센벵거를 쫓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가 국가대표 소집을 하면 잉글랜드 선수들 모두가 아스날선수들에게 달라붙었습니다.  어떻게 먹고 자고 뛰는지 이 모든 걸 궁금해했죠.



그리고 그들은 알게되었습니다. 아스날은 선수를 데려오는 스카우팅시스템부터, 훈련장에서, 경기전날 나눠주는 보고서까지 모든 게 한차원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벵거는 사소한거 하나하나 까지 다챙기면서 축구를 바꿔나갔고, 잉글랜드 축구 전역은 이 사소한 디테일에서부터 시작된 혁신이 무엇인지 알아내면서 축구를 바꿨습니다. 그러면 벵거가 바꾼 혁신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스카우팅 시스템입니다.


 벵거가 살뻔했던 선수들로 뽑는 베스트11은 , 이제 축구언론에서 해마다 뉴스거리가 없을때마다 꺼내는 단골뉴스이다. 그만큼 아스날의 스카우팅 네트워크는 유럽에 있는 모든 재능에 닿아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스카우팅 시스템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콜로투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트디부아르의 asec미모사라는 클럽에서 콜로투레를 15만 파운드에 데려와서 벵거는 무패우승의 주역으로 써먹은 다음 훗날 ,맨체스터 시티에 1400만 파운드에 팔았습니다. 


이 외에도 한때 잘나갔으나 잠깐 방황하는 재능, 혹은 타리그에서 저평가받던 선수들을 빨리 낚아채곤 했습니다.

방황하던 선수들 사례로는 ac밀란에서 실패한 비에이라, 인터밀란에서 실패한 은완코 카누, 유벤투스에서의 앙리가 있었고,

타리그에서 저평가 받던 선수로는 할름슈타트의 융베리, 코린치안스의 실빙요와, 에두 ,마요르카의 뛰던 로렌,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능을 모으기만해서는 안되었죠. 새로운 축구를 적응시켜야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벵거의 훈련법입니다.



 두번째는 훈련법입니다.


 아스날 레전드 폴머슨 인터뷰하길  "아르센벵거의 훈련법은 미래에서 온듯했고, 너무 앞서간 나머지 무섭기 까지했다" 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잉글랜드 축구는 한때의 한국축구처럼 무식하게 훈련하고 주먹구구식으로 훈련했습니다. 

 하지만 벵거는 달랐습니다. 모든 훈련이 체계적이였고 정해진 루틴이 있었습니다.스트레칭을 하면서 훈련을 시작하고,

 벵거는 타임워치를 들고, 모든 훈련세션 하나하나 시간을 재면서 어떤 행동이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를 체크했습니다. 그리고 선수들은 훈련할 때 심장박동수를 체크할 수 있는 모니터를 착용하며 한두시간 훈련을 하고 마쳤습니다. 




 과거 주먹구구식 무식하게 훈련하던 선수들은 이게 맞는 거냐. 더 뛰어야 하는 거아니냐 감독에게 따졌으나 벵거는 이정도면 충분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훈련법들이 오히려 선수들을 오래 많이 뛰게 만들었죠.


그리고 훈련이 끝난 이후에도 선수들은 자신이 먹어야할 음식과 식단에 대해서까지도 관리를 받았습니다. 먹어서는 안될 음식과, 먹어야할 음식들. 심지어 먹어야할 설탕의 종류마저도 어떻게 정해야할지를 말이죠.



이러한 디테일이 벵거 훈련법의 핵심이였습니다. 사소한 식단과 시간을 재고 정확히 필요한 훈련만 하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디테일에 벵거는 숫자를 얻었습니다. 바로 통계였습니다.




세번째 벵거가 도입한 것은 바로  통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벵거는 모나코 시절부터 통계 프로그램인 프로존을 사용했던 걸로 유명한데 이 프로존을 잉글리시 풋볼에도 도입했습니다.




(프로존 모습)

 경기마다 어떤 선수들이 어떻게 패스를 얼마나 주고 어디를 뛰었는지 정리된 보고서를 프로존을 통해 제공받고 이를 훈련과 경기에 적용한 것입니다. 

 해리 레드납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말하길, 프로존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는 상대축구를 파악하는 보고서에 라인업과 포지션만 적혀있었지만 프로존과 함께 우리는 상대가 어떻게 축구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방법과 함께 특유의 패스를 통한 기술축구, 이른바 벵거볼까지 섞으면서 벵거는 다시 없을 금자탑 38경기 26승 12무의 무패우승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해가 뜨면 지게 마련이고, 모든 혁신가들이 그렇듯, 벵거 역시 자신이 이뤄낸 성공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a부터 z까지 모든게 혁신적이었던 벵거의 철학을 모두가 따라하면서 이제는 그것들이 당연시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든 팀들이 해외로 스카우터를 보내고, 식이요법과 체력훈련을 도입했고, 심지어 패스축구까지 따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벵거가 이뤄낸 혁신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습니다. 벵거가 당연함을 당연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었고 벵거가 이끌어낸 이 당연함의 역전은 잉글랜드 축구를 바꿔놨습니다. 

 누구도 해내지못한 반 퍼기전선을 열었으며 반퍼거슨의 깃발을 들어올리지도 못하고, 다른 방법은 알지도 못하는 문외한 시절에 벵거는 반퍼기를 그 누구보다 선진적이고 획기적으로 이뤄냈고 심지어 라이벌 퍼거슨마저도 벵거의 디테일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벵거는 헤이젤 이후로 멈춰있던 잉글랜드 축구의 시계를 다시 유럽 스탠다드로 맞춰놓은 것입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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