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잉글랜드는 2차세계대전 기간에도 축구를 계속 했기때문입니다.
이렇게 그 당시에도 프로팀이 돌아갔고 리그 역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당시 잉글랜드는 어떻게 프로리그를 구성했을까요.
어떤 콧수염 달고
있는 독일인이 전 유럽을 상대로한 전쟁을 일으킨 1939년
축구협회 FA는 군대가 조직한 팀을 제외한 모든 축구에 대해 당국의 공식적인
통지가 있을때까지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아무래도 전쟁 위기에 축구를 냅둔다면 사람들 이미지에도 안좋아지고, 징병제나
폭격에 대한 위협들 역시 있어서 fa는 축구를 계속 진행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이 있었기때문입니다.
1914년 1차세계대전기간에 FA는 그냥 리그 진행을 계속 했기에 이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내무부에서는 1939년 9월 21일 제한적으로 축구를 계속 해도 좋다는 공지를 내렸습니다. 위험 지역은 8천명 그외 지역은 1만
5천명이 모여도 좋다는 단서조항을 달고 진행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전시는 전시였기에 팀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원정 다니는 것은 무리였고 거기다가 많은 선수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하게 되면서
FA는 결단을 내려야했고 결국 전국단위리그였던 당시 리그를 지역단위로 쪼개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해인 1939년에는
이렇게 지역별로
쪼갰습니다.
추가로 잉글랜드
사람들의 컵대회에 대한 열정이 여전히 가득했고 결국 전쟁시기에도 컵대회는 유지하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시라는
특수한 기간이기에 fa컵 대회는 중단시키고 새로운 대회인
football league (war) cup 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컵대회 하나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리그가
진행되었지만 많은 선수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했기에 리그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많은팀들이 고생했습니다.
울버햄튼은 무려 91명이 입대했고 리버풀은 76명, 허더스필드는 65명이 입대했고 이외에도 많은 팀들의 선수들이 입대했죠.
선수들은 실제로
입대를 하도록 적극 권유하면서 홍보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위 그림은 볼튼 원더러스 사진입니다. 볼튼 원더러스의
주장 해리 고슬린은 1939년 부활절날 치뤄진 경기에서 관중들보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라고 연설을
했고
그 다음주에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바로 자원입해서 왕실포병연대 53연대에 들어갔습니다.
위 그림에서 맨
왼쪽에 있는 인물이고 이분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1944년 안타깝게 사망했습니다.
축구는 전쟁기간동안
꽤나 인기가 여전히 많았습니다.
Fa컵 대신 생겨난 풋볼리그 전쟁컵 인기는 그야말로 엄청났는데 유일한 전국 단위 대회였기때문이죠.
40년에 열린 웨스트햄과 블랙번간의 결승전 관람객 숫자는 공식적인 집계로는 42399명이었습니다.
그당시 결승전
풍경을 볼 수 있는 유튜브입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죠.
프랑스가 빠르게
독일에게 항복하고나서 나치정부는 런던 대공습을 시작했고 더 많은 선수들이 징병되면서 각각의 팀들은 선수를 채우는데 더욱 힘이 들었지만 축구의 인기는
여전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fa는 다시 리그를 재편했고 북부리그 남부리그 이 두개로 쪼개게 되었습니다.
전쟁당시 축구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년마다 리그가 개편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높은 인기를
축구가 유지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음에도 영국 정부 당국이 축구를 냅두고 오히려 장려했던 이유는 축구라는 오락거리가 국민들에게 힘을 주고
군인들 사기를 증진시키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위 사진은 토트넘
경기장에 축구를 보러가는 군인들입니다.
실제로 영국군의
절반이상인 150만명은 전쟁기간 내내 대부분을 영국에서 계속 보냈고 스포츠는 이러한 군대들이 지루해지지않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엔터테인먼트였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각 축구팀들도
경기를 보러온 관중들로부터 모금을 해서 계속해서 전쟁에 도움되도록 지원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전쟁기간 여자들 축구팀도 활발하게 등장했죠.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이 증가하면서
이렇게 여성들도 축구팀을 꾸려서 리그를 진행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1년 벌여진 league war cup의 두번째 결승전은 아스날과
프레스톤이었습니다.
엄청난 전쟁에
대한 불안감에도 인기가는 여전했기에 프레스톤 홈경기장에서 6만명이 모여서 결승전을 관람했습니다.
https://youtu.be/tn8UPShBe8Y
이경기는 무승부로
끝나면서 재경기를 런던으로 옮겨서 진행했고 프레스톤이 2:1로 이기면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축구의 인기는
전쟁 중인 유럽에서도 높았습니다.
나치에게 포로로
잡힌 이 잉글랜드 군인들은 포로 수용소에서도 축구를 하면서
자기들이 있던
부대에 위문 편지나 지원을 해줬던 아스톤빌라팀을 기리는 이름으로 아스톤 빌라라는 이름으로 수용소내 축구팀을 만들고 축구를 했습니다 ㅋㅋ
이렇게 전쟁 한복판에서도
쉬는 기간이 되면 축구를 하곤 했는데
입대한 군인들중
선수출신들은 전쟁 중간에 정식 축구경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위 사진은 아스날
역대 득점 5위인 테드 드레이크라는 선수입니다.
그는 공군 중위로
군대를 복무했는데 1944년 프랑스
해방이후 현지 프랑스 주민들에게 대민지원을 명분으로 축구경기가 있었을 때 팀원으로 같이 활약했습니다.
이 군인팀은 프랑스팀과
경기해서 5:0으로 이기고 벨기에 브뤼셀로 넘어가서 벨기에팀과 경기를 했고 이경기에서는 3:0으로 이겼습니다.
이렇게 여러 일들이
있었던 wartime league는 연합군이 베를린 점령을 한 이후에도
전후 복구과정을
위해서 한시즌 더 진행되었습니다
다만 리그 war cup는 사라지고 fa컵은 부활했고
1946년 fa컵 결승은 더비 카운티대 찰튼 애슬레틱이었습니다.
이렇게 2차세계대전기간은 잉글랜드 축구는 비상시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쟁시 평소와는 다른 체제로 리그가 진행되었기에 이시기 기록에 대해서 인정해주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러다보니 기록관련해서 논란이 생기곤 했고 가장 크게 문제시 되었던 부분이 뉴캐슬 최다득점자 문제였습니다.
2005년 앨런 시어러가 206골로 클럽 역사상 최다 득점자로 은퇴했는데,
문제는 재키밀번이라는
선수였습니다. 이 선수가 전쟁떄 38골을 득점해서 이 득점을
포함하면 시어러는 2위로 밀려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올드 뉴캐슬팬들은 왈가왈부하면서 전쟁기간이라고 이를 넘어가는게 말이 많냐라고 다퉜지만 재키 밀번의 유족들이 시어러의 손을 들어주면서 결국 시어러가
공식적으로 뉴캐슬 최다득점자로 인정되었죠.
이처럼 전쟁때도
축구를 끊기지도 않았던 잉글랜드애들… 축구에 대한 열정이 어마어마했다고 밖에 말 못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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