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현대축구'는 1992년에 탄생했다.


누가 언제 발로 공을 차는 운동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고 이에 대해서 여러말이 많다.



코로나빼고 다 자기꺼라고 우기는 중국도 축구의 시작은 자기라고 얘기하고 우리나라도 신라시대때 공을 발로 차고 기록이 존재한다.



그래도 현재의 축구에 가까운 기틀을 세운건 영국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영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해주는 편이다. 그러나 그때의 축구는 굉장히 원시적이었다. 케임브릿지 룰이라는 최초의 축구 규칙을 만들었던 사람들, 즉 축구의 아버지들은 상대 정강이를 걷어차는 '기술'인 해킹을 합법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금지해야할지를 두고 다퉜다.



그렇다 상대 정강이를 까는 것도 초기 원시축구에서는 기술이었다; 아직까지 상남자 상대 발모가지 분질러야 성이 풀리는 뻥글랜드 다운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아는 축구는 언제 탄생했을까 그건 1990년대 초중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그럴까?




0. 1992년 프리미어리그가 탄생했다.



요건 내가 유튜브 영상으로도 만들었고 칼럼도 세편이나 썼죠 ㅋㅋ 이건 일단 패스하겠습니다.




1. 오프사이드 규칙의 변화




축구는 항상 인기와 상업성을 고민했기에 수비축구가 대세되는걸 언제나 경계해왔다.




그러나 시대가 발전하면서 수비전술이 언제나 공격전술보다 빠르게 발전했고 축구협회는 이에대해 골머리를 썩었다.



1954년 월드컵의 평균 득점률은 5.4였으나 1986년 월드컵의 경기당 평균득점은 2.4였다. 30년 기간 절반이나 줄어들은 것이다.



절정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다. 86년 월드컵때 유행하기 시작한 3-5-2 시스템은 이탈리아 월드컵때도 유행했고 대다수의 팀들은 수비적으로 내려앉아서 플레이했다.




1990년 결승 아르헨티나vs서독은 둘다 3-5-2의 대결이었고 서독 다음으로 그 대회 최고의 팀이었다고 뽑히는 이탈리아 역시 조나미스타와 3-5-2의 절충형 포메이션이었고 아르헨티나와의 경기 전까지 엄청난 무실점을 기록하관 했다.




엄청난 전술과 시스템들의 대결이었지만 피파는 이를 지긋지긋하게 여겼고 규칙을 손대기 시작했고 시작은 오프사이드였다.



오랜 원시축구가 있던 시절 모든 공격수들은 상대 골문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뻥차고 그안에서 헤딩거나 슈팅할 생각만 가득했다. 축구협회는 이런 말도안되는 짓을 없애기 위해 오프사이드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규칙은 점점 발전하고 정교해지면서 최종수비수 우리팀 공격수가 상대 최종수비수 두명보다 앞서있으면 오프사이드를 선언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동일선상 규칙을 1990년 월드컵 직후 피파는 도입했다.



동일선상이라는 규칙이 생기기전까지, 대부분의 공격수들은 상대수비보다 한발짝 늦게 침투해야했다. 그랬기에 대부분 팀들은 빠른 발로서 라인을 깨면서 상대 후방을 꿰뚫고 침투하는 선수들보다는 키 큰선수들이 공을 받아주거나 혹은 드리블도 갖춘선수가 아예 미리 볼을 받고 드리블로 제치는 걸 선호했다.



그러나 동일 선상이 생긴 이후로 상대의 스루패스를 받을 준비하고 뒷공간을 허무는 공격수들이 탄생했다.



이 사소한 규칙의 변화는 수비수들로 하여금 오프사이드라인에 더 섬세하게 신경쓰게 만들었고 수비들에게 많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또다른 규칙역시 등장했으니 백패스 규칙이었다.




3. 백패스 규칙





1992년 이전까지 골키퍼는 우리팀 선수가 발로 패스해주는 공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92년 이 규칙이 사라지면서 키퍼는 우발적으로 넘겨준 패스나 머리로 넘겨준 패스 이외의 우리팀 공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어찌보면 사소한 이 규칙은 그야말로 큰 변화를 만들었다.




유로 92는 유로 역사 두번의 큰 이변중 하나로 알려져있다. 하나는 04 그리스의 우승이고 또하나는 92 덴마크의 우승이었다.




덴마크에는 슈마이켈과 라우드럽형제라는 3명의 슈퍼스타가 있었지만 우리가 알던 그 '미카엘 라우드럽'은 이 대회를 나오지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덴마크가 우승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물론 엄청난 조직력을 바탕으로 멋진 공격력도 보여줬고 수비도 탄탄했다. 슈마이켈역시 미친듯한 선방으로 이시기 넘버원 골키퍼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지만 그들의 전술중 하나는 키퍼에게 볼돌리기였다.



좀 위험하다싶으면 냅다 키퍼로 백패스해서 키퍼가 볼을 잡게했던 이 전술은,



마티아스 잠머, 에펜베르크, 브레메,클린스만이 뛰던 독일을 무너뜨리고, 굴멘,반바스텐,쿠만,레이카르트의 네덜란드 역시 덴마크앞에 무너뜨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1990년 월드컵 역시 이러한 전술의 영향을 받았다. 3백의 일원들은 후방에서 편하게 플레이할 수 있었기에 더더욱 소극적으로 플레이했다.


이러한 수비위주의 전술을 폐지하고 루즈해지는 경기를 바꾸기 위해 피파는 이 백패스 규칙을 적용했다.



그리고 축구는 그날부로 바뀌었다.



어떻게냐면 바로 압박축구가 축구계의 화두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리고 사키와, 요한크루이프의 등장으로 80년대 후반 축구는 압박이라는 컨셉이 부상했다. 아리고 사키의 ac밀란과 요한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는 상대를 70년대 토탈사커를 이상향으로 삼으며 상대를 최전방에서부터 압박하고 볼을 빼앗은 다음 거기서 공격하려고 했다.


이둘은 지긋지긋한 수비축구를 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라만차라는 풍차에 돌진하는 돈키호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압박축구는 아직 시기가 이른 축구였다. 상대팀들은 압박이 들어오면 그저 키퍼에게 패스하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상대를 전방압박하기 위해 선수단이 전진된 상황에서 키퍼가 롱패스를 날리며 후방을 공격하면 뒷공간을 쉽게 노출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패스 규칙이 등장하며 상대 수비를 압박한상황에서, 수비가 키퍼에게 패스해도 키퍼가 그 볼을 잡을 수가 없고 키퍼역시 발로 처리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압박은 아주 효율적인 전술이 되어버린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많은 팀들이 전진한 압박이라는 전술을 머리에 염두에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프사이드 규칙과 함께 연계되면서 공격축구의 시대가 등장한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1995년에는 오프사이드시 공과 직접 관련있는 선수만이 오프사이드에 걸린다라는 세부규칙까지들어갔고



이따금 이렇게 볼상황과 상관없는 선수까지 오프사이드에 걸리는 일이 적어지면서 더더욱 수비들은 그전에 비해 더욱도 불안요소가 많아졌다.




4. 승점 3점의 등장


그리고 이러한 공격 축구에 한번더 불을 붙인것은 승점 3점의 등장이다.



과거 축구는 이기면 승점 2점 무승부는 1점이었다. 2무는 1승과 같은 가치로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팀들이 이기는 축구보다는 지지 않는 축구에 좀 더 포커스를 두었다.



이를 타개할 방법을 고민하던 영국축구협회는 승점 3점룰을 도입하려고 했다. 81년도에 떠오른 이 아이디어는 그러나 축구계에 바로 적용되지않았다.



그러나 수비축구에 고심하던 피파눈에 들어왔고 1994년 월드컵에 적용되었다.



1994년 미국월드컵은 앞서 바뀐 축구내 규칙과 승점 3점규정이 만나면서 조별예선부터 화끈한 득점들이 줄을 이었고, 공격축구의 시대를 연 월드컵으로 평가받았다. 이를 본 다른 리그들 역시 적극적으로 승점 3점규칙을 적용했다.




5. EU체제와 함께 보스만룰


1990년대 유럽축구 상징하는 또하나의 문구는 냉전붕괴에 따른 eu체제의 도입 자유경제의 도입이다. 그전까지 축구선수들은 계약기간이 끝나도 구단시 선수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현재 k리그가 fa된 선수라 할지라도 팀이 이적시키면 보상금을 받아야했던 상황이 당시 유럽에도 벌어지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벨기에 리그의 장마르크 보스만이 유럽사법재판소에 계약끝나면 자유롭게 이적해달라는 문제로 재판을 신청했고 그가 이겼다.



길고긴 보스만 룰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선수는 계약기간이 끝나면 어디든지 자유롭게 이적가능하고 같은 eu국가들 사이에는 외국인 쿼터제를 도입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 가운데가 장 마르크 보스만

 



이 판결은 유럽축구의 판도를 바꿨다. 당시 유럽의 거인으로 챔스를 호령하던 아약스는 이 보스만룰로 인해서 선수단이 여기저기 해외로 이적하는 결과를 나오면서 그뒤로 유럽대항전에서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까지 긴 기간이 걸렸다.

 

이외에도 수많은 이른바 변방리그라고 말하는 리그들은 선수유출을 막을 수가 없었고 빅리그 심화가 점점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가장 크게 이득본리그는 세리에a였다. 이피엘은 헤이젤참사이후로 계속 회복해나가는 단계였고 세리에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최고라는 리그 입지를 통해서 유럽의 재능들을 긁어왔고 90년대 세리에7공주가 등장하기 까지했다.

 

물론 그뒤로 여러 시간이 지났지만 보스만룰은 그야말로 유럽축구의 이적형태를 바꿔버리고 말았다.

 

 

 

6. 기타 등등

 

 

이외에도 수많은 일들이 90년대 초에 일어났다.

 

 

 유로피언컵이 챔피언스리그로 바뀌었다. 바뀌게 된 계기는 바로 마라도나의 나폴리였다. 이탈리아 챔피언인 마라도나의 나폴리가 유러피언컵에서 1라운드에서 탈락한 것은 유럽 빅리그 강팀들에게는 공포와 같았다. 이는 유에파측도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 중계권이 급속도로 올라가는 시기에 유에파가 가진 최고의 상품인 마라도나를 유럽대항전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그들은 더 많은 강팀들이 더 많은 경기수를 뛰어서 돈을 벌고싶었다. 이러한 유에파의 생각은 다른 빅리그 강팀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했고 유로피언컵-컵위너스컵-유에파컵 체제는 챔피언스리그-유에파컵 체제로 개편되었다.

 

거기다 스포츠 사이언스까지 도입되면서 식단에 다들 신경쓰고 보스만룰 해체와 함께 수많은 스카우터들이 각팀에 도입되고 94미국월드컵에 영향으로 미국 스포츠 비즈니스 방법 역시 유럽스포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과거와 현재 축구는 공을 발로 다루는 스포츠라는 의미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90년대 초반과 그 이전 축구는 완전다르고 우리가 아는 '현대축구'는 그시기에 새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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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 기본에다가 제가 썼던 글들 몇개 섞어서 걍 요약베껴온거에용 

 

 

맨날 유튜브 홍보만 해서 민망시러워서 유튜브 홍보가 아닌 글도 올려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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