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피엘에 로테이션과 압박간격을 갖고 온 마법사, 라파 베니테즈


  혹시 제-토라인에 대해서 다들 기억하시나요. 토레스와 제라드 콤비는 그때 당시 이피엘에서 가장 강력한 콤비였습니다. 아래 알론소와 마스체라노가 받쳐주고 그위에서 제라트와 토레스가 폭격하던 리버풀은 우승도 노리던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강력한 리버풀이었지만 팬들마다 매주 화제가 되던 얘기는 다른 얘기였습니다. 바로 로테이션이었습니다. 로테이션은 선수단을 휴식시켜주기 위해 후보 선수를 주전으로 활용하거나 선수마다 일정 주기를 둬서 경기에 교대로 출전하게 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다만 이 로테이션을 통해서 리버풀은 경기력의 최저점을 담보했지만 반대로 최고점의 경기력을 유지해야할 타이밍역시 오래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쭉쭉 치고 나가야할 타이밍에 번번이 로테이션에 의해 흔들리면서 승점을 드랍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이처럼 당시 리버풀은 개성넘치는 화려한 스타들이 있었지만 선수단은 앞서 로테이션의 경우와 같이 감독의 지침아래에서 철저하게 부품처럼 움직였습니다. 


 그 당시 리버풀 감독은 심지어 선수단을 철저하게 체스 기물처럼 생각해서 선수단과도 사적인 친분을 유지하기보다 거리가 있었고, 선수단으로부터 차가운 인물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하지만 굉장히 차갑고 냉혈한으로 평가받았던 이 인물은, 이스탄불에서 써낸 기적으로 전세계 모든 콥들의 피를 그 누구보다도 더 뜨겁고 끓어오르게 만들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축무위키에서 소개할 혁명가는 철저한 라인통제와 로테이션을 이피엘에 도입하면서 흔들리고 있던 리버풀을 다시 유럽의 중심으로 세웠던 남자. 라파 베니테즈입니다.




2000년대 초반은 공격축구의 시기였습니다.



 국제 대회에서 그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올해 개막한 유로 2020이 깨기전까지 유로 2000은 경기당 평균 2.74골로, 근 20년간 가장 많은 득점이 나온 대회였습니다. 이피엘에서도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피엘은 10번 유형의 플레이메이커를 내세웠고 감독은 이 10번 플레이메이커에게 공격전술을 온전히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줬습니다. 칸토나,베르캄프,졸라 같은 선수들이 피엘에서 이러한 자유도 아래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공격축구 흐름은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00년대 중후반부터는 수비축구의 시대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을 이끈 남자는 조세 무리뉴였습니다. 그는 마케렐레와 함께 마케렐레 롤을 만들었습니다. 전문적으로 수비만 하는 수비형 미드필더를 세웠고 이 역할을 앞세우며 프리미어리그의 수많은 10번 유형의 선수들을 박살내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조세 무리뉴만이 이러한 수비축구의 흐름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던 오늘의 혁명가 라파 베니테즈 역시도 이러한 수비축구의 흐름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습니다.





( 2007년 당시 핵노잼 수비축구로 베니테즈의 리버풀과, 무리뉴의 첼시가 축구를 망치고 있다고 말하는 레알마드리드의 호르헤 발다노)



 라파 베니테즈는 4-2-3-1을 발렌시아 시절부터 주 포메이션으로 활용했습니다. 4-2-3-1을 활용했기에 베니테즈 팀에도 항상 10번 유형의 플레이메이커가 존재했습니다.


발렌시아 시절에는 아이마르였고 리버풀 시절에는 제라드였죠.



하지만 베니테즈는 이들에게 온전한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베니테즈의 통제 아래에서 수비가담도 열심히 해야했습니다. 



(압박왕 아이마르)

발렌시아 시절 아이마르는 라리가를 대표하는 플레이메이커였지만 동시에 엄청난 수비가담으로 유명했던 선수였습니다. 

 아이마르가 볼을 끊어내고 바로 전방으로 다시 볼을 뿌리면서 역습해나가던 모습은 당시 발렌시아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모습이었습니다.


 리버풀에서도 제라드를 이런식으로 기용했습니다.  베니테즈는  10번 선수에게 자유 대신 철저한 통제를 갖고 압박의 역할을 부여하는 이피엘 내 최초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적 통제는 제라드를 넘어서 리버풀 전체 선수에게 가해졌습니다.



라파 베니테즈는 어린 시절 아리고사키의 AC밀란 축구를 보고 완전히 반했습니다. 그는 아리고 사키의 축구야 말로 축구의 이상향이었으며 자신이 지도하는 팀은 아리고 사키의 축구를 따라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엘 그라피코와의 인터뷰에서 '내 축구에서 핵심 롤모델은 아리고 사키였다.' 아리고 사키의 축구는 내게 있어 너무나도 미스터리와도 같았다. tv화면은 너무나도 작아서 아리고 사키의 축구를 전체적으로 보여주질 못했다. 나는 축구장 전체를 보고 사키의 축구를 이해하고 싶었다' 라고 했습니다. 



 아리고 사키의 축구는 4-4-2를 바탕으로 10명의 선수들이 마치 하나의 기계가 된양 팀각 라인별 간격이 흐트림 없이 전체가 동시에 상대를 압박해서 볼을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베니테즈는 이러한 축구를 이피엘에도 도입했습니다. 

리버풀은 시작은 4-2-3-1이었습니다만 수비시에는 4-4-2에 가까웠습니다.




(컴팩트한 간격유지로 상대에게 공간을 허용안하고 있는 베니테즈의 리버풀)




 실제로 공수간격이 극단적으로 좁은 리버풀 팀 전체는 기계처럼 움직이면서 상대를 압박가했고 중앙에 선수가 볼을 갖고 들어오면 그대로 둘러싸서 잡아버리곤 했습니다. 

 허나 때론 너무 지나친 간격 유지에 의해 뒷공간이 뚫리곤 했고 이를 위해선 골키퍼가 튀어나와 막아야했습니다.

 그래서 베니테즈는 이스탄불의 기적을 써내린 두덱 대신 바르셀로나에서 배우며 현대적인 골키퍼 훈련법을 익혀온 페페 레이나를 데려왔습니다.





(볼을 나와서 미리 끊어내는 레이나)


 경기중 베니테즈의 모습을 보면 테크니얼 에어리어에서 끊임없이 손을 흔들면서 선수들에게 공수 간격을 좁히라고 지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라파 베니테즈의 마법사 라고 돌던 짤도 그가 간격을 좁히라고 지시하는 장면에서 따온 것입니다.



 캐러거는 이에 대해 ‘ 만나는 팀마다 우리와 대결하는 걸 증오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숨쉴 공간조차 허용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리고 이걸 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라파한테 ‘콤팩트’라는 단어를 들었다. 라파와 1년간 함께하고 난뒤 우리는 로봇이 된듯한 기분이었다. 라파는 자신이 원하는 기준에 들때까지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똑같은 훈련을 반복했다.” 라고 인터뷰했습니다.




 
 문제는 베니테즈의 방법은 선수단에게 너무나도 많은 체력을 요구했습니다.  베니테즈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테이션을 도입했습니다. 선수단 전체가 주기적으로 돌아가면서 경기를 출전하고 이를 통해 체력을 보존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챔피언스리그에서는 강팀으로 군림했습니다. 당시 리버풀을 두고 챔피언스리그 DNA가 있다는 말마저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수비보다는 공격이 더 중요시 여겨지던 리그에서는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로테이션 때문에 선수단의 분위기가 계속 이어나가기 어려웠고 리에라 페넌트 마크 곤잘레스와 같은 측면윙어들은 리버풀 같은 팀에서 뛰기에는 기량이 아쉬웠던 선수들이었으나 베니테즈가 원하는  간격유지, 전술 요구에 부합하는 선수였기에 영입되곤 했습니다.

 결국 제라드 토레스 라인 외에는 공격의 다양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우승에 가장 근접했던 08-09시즌에는 스토크,풀럼,웨스트햄,아스톤빌라,스토크와의 경기에서 무득점 무승부를 거두면서 우승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파 베니테즈는 이피엘에 그때까지 없던 정밀한 전술적 통제와 로테이션을 갖고 왔던 감독이었습니다.


 무리뉴의 첼시에게 모두가 압도당할 때 똑같이 대륙에서 건너온 축구를 구사하며 베니테즈는 3년간 15번 만나면서 5승 3무 7패를 거두면서 대등한 경기를 펼쳤고 챔피언스리그와 같은 주요무대에서는 첼시를 꺾기도 했습니다.


 베니테즈는 선수단 개개인의 스타일에 맞춰서 플레이하기보다는 감독의 철학이 더 중요해졌다는걸 이피엘에 보여준 감독이었습니다. 또한 우승과 멀어지고 두번의 참사이후 힘들어하던 리버풀 팬들에게 이스탄불의 기적을 선사하면서 리버풀이 다시 부활했음을 알려준 감독이었습니다.

라파 베니테즈는 그야말로 이피엘의 혁명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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