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데인 : 현재의 프리미어리그와 아스날을 만든 남자(3)




 2006년 5월 17일 아스날은 파리에 위치한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치렀다. 결과는 아쉬운 석패였지만 아스날의 미래는 데인이 그렸던 청사진을 현실로 구현해온 것만 같았다. 미래가 창창해보이는 수많은 유망주들, 다음시즌에 완공을 앞두고 있는 6만석 규모의 새 경기장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새로 연장계약을 하면서 많은 돈을 안겨준 스폰서 나이키, 자신이 직접 출범시킨 프리미어리그만큼이나 혁신적이면서도 무패우승이라는 누구도 못 이룰 금자탑을 이뤄낸 감독 아르센벵거까지. 데인이 꿈꾸던 아스날이 이제는 손에 닿을듯이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1년뒤 2007년 4월 아스날 이사회는 데이비드 데인의 부회장직 박탈에 대한 투표를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힐우드회장은 데인에게 분노를 직접적으로 분노를 표하면서 이사회를 소집했고, 그렇게 이사회에 모인 사람들은 투표를 진행했다. 아스날의 디렉터를 담당하고 있던 대니피츠만은 표결을 위해서 데이비드 데인의 핸드폰을 빼앗고 방에서 내쫓았다.  그렇게 진행된 투표결과 데인은 부회장직에서 박탈되었고 이사회에서 쫓겨났다. 아스날의 청사진을 그리고 아스날이라는 클럽을 세계적인 클럽으로 이끌었던 그가, 그렇게 아스날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축구계 모든 인사들은 충격에 빠졌다.



 1983년 아스날과 축구라는 세계에 갓들어온 시절과 달리 데이비드 데인은 축구계에서조차 이미 거물이었다. 프리미어리그를 출범시키고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 웸블리를 새로짓는 뉴웸블리 프로젝트도 기여하며 FA의 부회장직에 올랐으며  유럽 엘리트클럽 모임이며 슈퍼리그를 계획중이었던 G14에서는 아스날대표이자 동시에 G14 모임의 회장이었다. 그의 주도 아래 G14는 유에파와 피파와도 여러문제에 있어서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이렇게 나열하는데도 숨이 차는 직함과 업적을 데인은 이제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데이비드 데인이 아스날에서 나간다는 것은, 아니 심지어 쫓겨나는 것을 예측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데인은 아스날에서 쫓겨나게 된 것일까. 데인의 폰을 빼앗았다는 대니피츠만은 누구일까. 이를 알기 위해선 90년대의 아스날로부터 거슬러올라가야한다.


 데이비드 데인이 원했던 프리미어리그가 92년에 출범했지만 그와 별개로 아스날은 축구적으로 굉장히 안풀렸다. 부임하기 전 아스날은 88-89시즌, 90-91시즌 이렇게 격년으로 우승하면서 리그내에 타이틀 경쟁자였지만 리그가 새로 출범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첫해에 4위 그 이듬해 10위를 기록하면서 굉장히 리그성적은 부침을 겪기 시작했다. 물론 그기간동안 fa컵,리그컵 더블을 달성하고 그 다음시즌은 컵위너스컵을 우승하면서 트로피는 들어올렸지만 분명히 아스날의 축구는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떨어지는 순위를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조지 그레이엄은 PL출범전 보여줬던 공격적인 축구를 버리고 수비적인 축구를 구사했고 아스날은 보링 보링 아스날(boring boring arsenal)이라는 멸칭마저 생겼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감독 조지 그레이엄의 뇌물스캔들까지 터지면서 조지그레이엄은 경질되었고 아스날은 그야말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아스날에 구세주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대니피츠만이다. 아스날은  이렇게 처참한 상황에서도 아스날은 92년도 발롱도르 3위, 93년도 발롱2위를 기록한 데니스 베르캄프를 1995년 데려온다. 비록 인테르에서 안좋은 퍼포먼스였다고 모든이들을 깜짝 놀라게할정도로 엄청난 영입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데 있어서 데이비드 데인의 수완과 안목이 한 역할 했지만 가장 큰 문제인 돈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대니 피츠만이었다.






 대니피츠만은 유대계 사업자로 그의 주 사업은 다이아몬드였다. 다이아몬드로 돈을 번 그는 어렸을때부터 팬이었던 클럽인 아스날에 자금을 투자하기로 맘먹었다. 1990년 그는 같은 유대계였던 데이비드 데인과 접촉했고 데인은 피츠만을 파트너로서 매력을 느꼈다.  당시 데인이 가지고 있었던 아스날 지분은 전체지분의 42%였다. 이 지분중 절반이 넘는 비율인 데인은 피츠만에게 팔았고 피츠만은 아스날 지분 천제의 26% 데인은 15%를 가지게 되었다.






  피츠만은 아스날에 들어와서 자금적으로 많은 도움을 제공했다. 아스날판 1990년대 슈가대디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베르캄프 이적료 외에도 여러 선수들의 재계약 비용도 보조를 해줬다. 당시를 회고하던 토니 아담스에 따르면 아스날이 재정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대니피츠만이 돈을 대줬고 그덕분에 베르캄프도 사오고 선수들을 재계약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니피츠만을 단순히 자금만 보조해준 사람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아스날이 아직 베르캄프와 같은 선수를 품을 준비가 안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더 나은 체계와 비즈니스 시스템을 갖춰야한다고 지적했고 보드진에 들어와 적극적으로 아스날 경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데인이 원하던 모습이었다. 데이비드 데인은 자신이 아스날에서 맡았던 역할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분담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자신이 축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여러 사업에 집중하고 켄프라이어와 피츠만에게 비즈니스 파트를 맡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선수도 영입하고 구단 내 비즈니스를 맡아줄 사람까지 생겼다. 데인이 생각하기에 아스날에 필요한 것은 이제 단 하나였다. 바로 축구였다. 그리고 축구를 채워줄 인물 역시 데인은 이미 구상해놨다.  



 1989년 데인이 PL출범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고생하던 그 해, 데이비드 데인은 토트넘과의 홈경기를 보러 하이버리에 찾아갔다. 경기를 지켜보는 중 데인의 아내는 데인에게 지금 as모나코 감독이 아스날 경기를 보러왔다고 알려줬다. 데인은 하프타임에 안경을 쓰고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던 그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가 바로 아르센 벵거였다.





 데인은 그 만남에서 4개국어를 하고 경제학 학위를 지닌 이 남자에게 매료되었고 벵거 역시 잉글랜드 스포츠 비즈니스를 뒤엎은 혁신가를 마음에 들게 되었고 이 둘은 이내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만남은 아스날을 바꾸고 더 나아가 잉글랜드 축구계를 바꿀 만남이 되었다.



당 시 아스날은 리그 우승한 감독인 조지 그레이엄이 있었기에 감독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조지그레이엄이 스캔들로 떠난 1995년 데인의 머릿속에는 단 한명의 후보군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이사진들은 그 이름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아스날 회장이었던 힐우드는 벵거와의 만남에서 좋은 인상을 가졌지만 잉글랜드에 과연 외국인 감독이 적합할까라는 의구심을 가졌고 다른 이사진들 역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아르센 벵거를 선임하지 않았고 힐우드는 자신의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리오치는 아스날이라는 클럽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 아니었고 1년만에 떠나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야말로 아르센 벵거가 아스날로 오게되었다. 


 2018년 가지디스는 라울 산레히, 미슐린타트를 데려오면 자기만의 3두정치를 구상한바 있다. 가지디스가 떠나면서 이 체제는 와해되어 현재는 산레히 혼자 아스날에 남아있지만 데인은 이를 성공시켰다.

 축구에 있어서는 벵거, 비즈니스는 대니피츠만 그리고 데인 자신을 이 모든걸 총괄하는 사람으로서 완성되었다. 


(왼쪽의 데인 가운데 벵거 오른쪽의 대니피츠만)


이렇게 형성된 3총사는 아스날의 황금기를 이뤘다. 


97-98의 fa,리그 더블, 01-02 다시한번 fa,리그 더블

0304 무패우승까지, 아스날은 퍼거슨의 런던왕조에 대항할 유일한 클럽이었고 특유의 공격축구로 인기만큼은 영국 아니 유럽 내에서도 손꼽힐 팀이었다. 



그러나 빛이 진하면 그림자도 역시 그만큼 짙다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화려한 아스날이었지만 여전히 아스날내 문제점들은 산적해 있었다.

 1913년 지어져서 낙후된 경기장으로 인해서 적은 수입은 아스날의 발목을 계속 잡았다. 무패우승을 하던 2003-2004시즌에도 아스날은 주급이 밀려서 선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의 파해법으로 데인과 피츠만이 꺼내든 카드는 새로운 구장건설이었다. 넓은 구장을 건설해서 아스날의 수입을 증가시켜서 재정적으로 안정화를 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 구장건설을 ‘어떻게’ 지을까해서 이 둘의 생각은 갈라졌다.

데인은 그 당시 FA측에서 계획중이던 뉴 웸블리 계획과 연계할 생각을 했고 피츠만은 독자적인 아스날만의 구장을 지으려고 했다. 단순하게 방법론만 달랐을 이 둘의 생각이 나중에 거대한 갈등으로 이어질지는 그때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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