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서 압박은 과연 누가 발명했을까?(1)

 현대 축구를 보는 우리 모두 항상 압박을 입에 달고 삽니다. 압박이 부족해, 압박이 너무 강하다.  탈압박을 잘해야한다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압박에 굉장히 주목하게 된 계기는 한국축구에서 히딩크가 시작이였고, 그게 점점 더 전폭적으로 커진 것은 펩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와 그직후 등장한 클롭의 게겐프레싱이였습니다.


 허나 축구에서 압박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였고 항상 언제든지 존재했던 개념이였습니다. 실제로 게겐프레싱이 전세계를 휩쓸던 시기, 레드납은 압박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압박에 관한 온갖 말들은 모두 허튼소리다. 압박은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성공하고 싶은 팀들은 모두 열심히 뛰어야 한다.”

 

 레드납의 이 발언은 반은 틀린 말이었습니다.  

 

 그 당시 등장한 게겐프레싱은 분명 열심히 뛰는 것 이상의 확고한 목적론을 가진 축구였습니다.  이 축구를 단순히 많이 뛰는 축구라고 지칭하는 것은 레드납이 게겐프레싱이라는 개념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대문입니다.

 

그러나 레드납의 발언에 반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압박이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다는 얘기 말입니다.

 

 압박은 꾸준히 축구계 아니 축구를 벗어나 공을 다루는 단체스포츠에서 언제나 메인 이슈였습니다. 그러면 압박은 과연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발전했을까요.

 

 

 오늘 소개할 주제는 압박의 역사입니다.

 

 

 공을 다루는 스포츠중에서 가장 먼저 압박 개념을 도입한 스포츠는 아이스하키였습니다.




 1930년대 아이스하키 지도자였던 토마스 패트릭 고먼은 어느날 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 아이디어는 간단했습니다

 

 

-골대 근처에서 수비하지말고 앞으로 나아가서 상대를 압박하면서 상대의 공격을 앞에서 차단하면 어떨까?

 

 

 고먼은 이 간단한 아이디어가 훗날 자신의 종목을 떠나 수많은 스포츠에 영향을 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될 줄 몰랐습니다.

 

 고먼은 공격수들에게 빌드업하는 상대수비에게 돌진하라고 지시했고 수비들 역시 중앙까지 나아가서 패스를 끊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배후공간을 다 내주고 전진하라는 얘기에 선수들은 자살행위가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상대가 우리를 뚫고나가면 고속도로처럼 뚫리는 거 아니냐고 말이죠.

 

 그리고 실제로 첫 5경기에서 고먼의 팀은 4패를 했습니다. 그러나 고먼은 ‘상대의 테크닉 좋은 선수들은 수비에 서지않을 것이다. 우리가 상대의 공을 몰고가는선수들을 순식간에 둘러쌓고 빼앗으면 상대는 어쩔줄 모를것이다.’ 라고 얘기하면서 뚝심있게 밀어부쳤습니다.

 

 

 그리고 이 뚝심은 결과로 이어졌죠. 그의 시카고 블랙호크스가 스탠리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렇게 압박은 당연한 전술이 되었고 이 압박에 대해 고먼은 '포어체킹'이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에 포어체킹이라는 용어를 들여온 축구전문가 박문성. 참고로 독일축구에서 전방압박을 지칭하는 말로 포어체킹라고 정말로 사용합니다.)

 

 

압박이 드디어 스포츠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구기 종목에 '포어체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압박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이죠.

 

그러면 압박, 즉 press라는 단어는 어느 종목에서 시작했을까요.

 

 바로 농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흑인 농구 코치였던 존 멕렌던은 풀 코트 프레스 스타일의 이름을 가진 전술을 농구에 등장시켰습니다. 

 

 

 그전과 달리 코트 전역에서 상대를 압박하는 이 전술을 통해 좋은 결과를 거두었고, 이를 다른 백인 코치들이 주목하고 받아들이면서 press, 즉 압박이라는 용어가 구기종목에도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풀코트를 떠나 올코트 프레스가 등장하는 만화, 슬램덩크) 

 

구기 종목들에서 압박이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허나 오늘의 주제는 축구에 언제 압박이 시작했냐 이빈다. 

 

 

 

그렇다면 축구는 언제 압박을 시작했을까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압박축구를 하던 초기팀은 1974년 리누스 미헬스감독이 이끌던 네덜란드팀일 것이다. 그러나 리누스 미헬스의 네덜란드는 토탈풋볼, 압박을 가장 이상적으로 그려낸 팀일 뿐이지 '최초'의 팀은 아니었습니다.

 

 

  최초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inverted pyramid의 저자 조나단 윌슨은 최초의 압박을 축구에 접목시킨 감독으로 빅토르 마슬로프를 지목했습니다.

 

 

 

 빅토르 마슬로프는 1964년부터 1970년 까지 디나모 키예프를 이끈 러시아감독입니다. 집단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의 이론은, 단순히 소련의 정치적 이념을 떠나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축구에 까지 그 손을 뻗기 시작했습니다 . 빅토르 마슬로프는 디나모 키예프의 축구 역시도 개개인의 마술이나 능력이 아닌, 감독의 지도아래 집단적인 축구가 될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렇기에 선수들의 수비 역시도 집단적으로 움직여야했습니다.

 

 

 “ 수비한명이 상대 수비를 1대1로 대적하는 맨마킹은 감독으로서 직무유기에 가깝다”라고 말했던 그는 조직적인 압박의 초기형태를 보여줬습니다.

 

 이를 선공하기 위해서 그랬기에 그는 1950년대 브라질을 중심으로 잠깐 반짝였던 지역방어를 유럽축구에 온전히 뿌리내리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압박이라는 단어를 언론에 처음으로 사용하던 축구감독이었습니다.

 

  그리고 압박을 위해서는 빠른 속도가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축구는 비행기와 같다, 속도가 빨라져야한다. 그러나 빠르기 위해선 공기저항을 피해야한다. 그렇기에 당신은 앞부분을 더욱 유선형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이런 발언을 했던 그는, 당시 축구계에 유행하던 424가 지나치게 앞쪽이 무겁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양쪽 공격수를 미드필더로 내리는 4-4-2를 고안했습니다. 더나아가 나중에는 2톱도 많고 원톱의 시대가 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디나모 키예프의 이런 집단적인 축구에 대해서 조나단 윌슨은 “디나모의 중원은 무리를 지어서 사냥했고, 이전에 그 누구도 상상못했던 상대의 목줄위치부터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마슬로프는 압박의 초기형태를 고안했고 이는 후계자 로바노프스키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또다른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출신 에른스트 하펠을 지목하기도 합니다.


마슬로브가 사회주의 한 가운데에서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축구를 했다면, 하펠의 경우는 외부에서 이를 바라보며 영향을 받았습니다. 라피트빈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그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팀들과의 경기를 치루곤 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개개인의 드리블과 개성을 강조하는 기존 축구가 아닌 집단으로 수비와 공격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식 축구를 보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후 네덜란드리그에서 감독생활을 하며 그 영감을 현장에 적용시켰다. 그는 오프사이드트랩을 결합한 압박축구를 선보였습니다. ‘

 

 

그 역시 당시 유행하던 브라질식 424를 사용해왔지만, 424로서는 압박이 힘들다고 생각하고 다른 포메이션을 고안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더치시스템,네덜란드 시스템이라고 불리우는 433을 고안했습니다. 마슬로프말처럼 앞쪽을 줄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고안을 바탕으로 압박 축구를 시작한 그는 ADO덴하흐 라는 팀으로 네덜란드컵을 차지했으며 추후에는 페예노르트를 감독하며 1970년 깜짝 유로피언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70년 셀틱과 페예노르트의 유로피언컵 결승전을 보면 셀틱이 424를 사용하고 있고 페예노르트는 433을 통해서 경기를 지배하고 주도권을 가져오려했습니다.

 

 

이렇게 네덜란드 리그내에서 압박을 유행하고 선도하던 하펠의 모습에 네덜란드리그는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같은 리그에 있던 라이벌 아약스와 감독 미헬스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아약스 역시 빠르게 433시스템을 익혔고 하펠의 압박축구를 적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몇몇 페예노르트 팬들은 하펠의 아이디어를 리누스 미헬스가 훔쳐가고 자기껏인양 으스대었다고 말하며 비난을 하기도 했죠.

 

 

이 둘 중 누가 압박을 발명했고 퍼트렸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지만 확실한건 이시기에 압박이 축구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마치 뉴턴과 라이프니치가 동시에 미적분을 떠올렸던 것처럼 두 천재가 동시에 떠올렸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어찌되었든 압박축구 계보의 시작에서 한쪽은 동유럽이였다면 다른 한쪽은 오스트리아-네덜란드쪽이였습니다.

 

 이 압박의 아버지들은 차근차근 압박을 현장에 구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압박의 이데아, 토탈풋볼을 세계에 가장 센세이셔널하게 보여준 인물을 따로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인물 하펠을 따라했다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압박축구를 전세계에 보여준 사람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미헬스 그리고 그와 아약스, 1974년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함께한 페르소나 요한 크루이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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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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